미키 내각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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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키 내각 (개조)는 1976년 미키 다케오 총리에 의해 단행된 내각 개조로, 중의원 임기 만료와 '미키 밀어내기' 움직임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었다. 자유민주당 내 권력 투쟁 속에서, 개조 내각은 '반 다나카' 색채를 강화하고, 중의원 선거 참패 이후 후쿠다 다케오가 신 총재로 선출되면서 퇴진 압박을 받았다. 내각은 주요 각료 및 정무 차관을 포함한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졌으며, 방위, 경제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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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내각 (개조)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미키 개조내각 |
대수 | 66 |
수상 이름 | 미키 다케오 |
성립 연도 | 1976년 |
성립 월일 | 9월 15일 |
종료 연도 | 1976년 |
종료 월일 | 12월 24일 |
여당 | 자유민주당 |
선거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해산 | 1976년 12월 9일(임기 만료) 록히드 해산 |
명단 | 내각 명단 (일본 총리대신 관저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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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립 배경 및 정치적 상황
미키 내각에서 미키 내각 개조내각으로의 개조는 그해 연말 중의원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임기 만료 전 해산 총선거를 노리는 미키 다케오 총리와 '미키 밀어내기'라는 격렬한 퇴진 운동을 전개했던 자유민주당 내 반(反)주류파 간의 권력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키 총리는 결국 해산 단행을 포기하고 반주류파에 타협하는 방식을 택했다.[1]
미키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에 '미키 밀어내기'의 본거지였던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에 속하지 않은 인물을 기용했다. 그 결과, 다나카파에서는 마에다 마사오만이 기용되어 '반(反) 다나카' 색채가 뚜렷해졌다.
각 연도의 방위비를 국민 총생산 (GNP)의 1% 이내로 억제하는 것을 각의에서 결정했다.[1]
2. 1. 자민당 내 권력 투쟁
미키 내각에서 미키 내각 개조내각으로의 내각 개조는 그해 연말에 쫓기고 있던 중의원의 임기 만료를 노리고 중의원의 임기 만료 전에 해산 총선거를 노리는 미키 총리와 ‘미키 밀어내기’라고 불리는 극렬한 도각 운동을 전개했던 반주류파의 공방 끝에 미키가 해산 단행을 포기하고 반주류파에 타협하는 방식으로 실행해 나갔다고 한다. 미키 내각 개조내각의 조각에서 자유민주당의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은 반주류파 중에서 ‘미키 밀어내기’의 본거지가 된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에 속하지 않는 인물을 각료로 기용했다. 이 결과, 다나카파에서의 기용은 마에다 마사오뿐이어서 ‘반 다나카’ 색채가 선명하게 됐다.[1]2. 2. 1976년 중의원 선거
미키 내각에서 미키 내각 개조내각으로의 내각 개조는 그해 연말에 쫓기고 있던 중의원의 임기 만료를 노리고 중의원의 임기 만료 전에 해산 총선거를 노리는 미키 총리와 ‘미키 밀어내기’라고 불리는 극렬한 도각 운동을 전개했던 반주류파의 공방 끝에 미키가 해산 단행을 포기하고 반주류파에 타협하는 방식으로 실행해 나갔다고 한다. 미키 내각 개조내각의 조각에서 자유민주당의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은 반주류파 중에서 ‘미키 밀어내기’의 본거가 된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에 속하지 않는 인물을 각료로 기용했다. 이 결과, 다나카파에서의 기용은 마에다 마사오뿐이어서 ‘반 다나카’ 색채가 선명하게 됐다.이 내각으로 중의원 임기 만료 선거를 치르게 됐지만 자유민주당은 의석 감소를 겪었다.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으로 후쿠다 다케오가 자민당 신 총재로 선출되었고, 미키 정권은 퇴진에 몰리게 되었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 성립).[1]
3. 내각 구성
미키 내각 개조내각은 1976년 중의원 임기 만료를 앞두고 '미키 밀어내기'라는 격렬한 당내 투쟁 속에서 미키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포기하고 반주류파와 타협하면서 구성되었다.
자유민주당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에는 '미키 밀어내기'의 본거지였던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에 속하지 않은 인물들이 기용되었다. 다나카파에서는 마에다 마사오만이 기용되어 '반 다나카' 색채가 뚜렷했다.
이 내각은 중의원 임기 만료 선거를 치렀으나 자유민주당은 의석 감소를 겪었고, 미키 정권은 퇴진 압박을 받았다. 이후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으로 후쿠다 다케오가 자민당 신 총재로 선출되었고, 미키 정권은 퇴진하였다.
각의에서는 연도별 방위비를 국민 총생산 (GNP)의 1% 틀 이내로 억제하기로 결정했다.[1]
3. 1. 주요 각료
자유민주당 (미키 파벌)자유민주당 (후쿠다 파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 파벌)

자유민주당 (오히라 파벌)
자유민주당 (오히라 파벌)

자유민주당 (무파벌)

자유민주당 (나카소네 파벌)

자유민주당 (미키 파벌)

자유민주당 (무파벌)
자유민주당 (미키 파벌)

자유민주당 (오히라 파벌)
자유민주당 (후쿠다 파벌)
자유민주당 (오히라 파벌)

자유민주당 (미키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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